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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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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무라 히토시는 1886년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태어난 일본 육군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태평양 전쟁 초기 자바섬 공략을 지휘하여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그는 현지인들을 존중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군부의 반발로 라바울로 전출되었다. 전쟁 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복역 후 회상록을 출간하고 전사자 유족에게 수입을 기부했다. 1968년 사망했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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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히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히토시 이마무라 (今村 均)'
로마자 표기Hitoshi Imamura
출생일1886년 6월 28일
출생지미야기현 센다이시
사망일1968년 10월 4일
사망지도쿄
별명(없음)
묘소(알 수 없음)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07년 – 1945년
최종 계급대장
주요 지휘제5사단
제23군
제16군
제8방면군
주요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뉴기니 전역
솔로몬 제도 전역
소속 연대제4 보병연대
훈장
훈장금치훈장
욱일장
기타
이후 활동작가
방위청 고문(역임)
이미지
히토시 이마무라

2. 생애

이마무라 히토시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출신으로, 도쿄에서 문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재판관인 아버지의 반대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의 권유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8]

이마무라 히토시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907년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19기), 견습사관.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4연대 소속.
1910년육군 보병 중위 진급.
1915년육군대학교 졸업(27기 수석).
1916년육군성 군무국 소속(보병과).
1917년육군 보병 대위 진급. 육군성 군무국 과원.
1918년영국 대사관 소속 무관보좌관.
1921년참모본부 부원.
1922년육군 보병 소좌 진급.
1923년우에하라 유사쿠 원수 부속 부관(겸임).
1926년육군 보병 중좌 진급. 보병 제74연대 소속.
1927년영국령 인도 주재 무관, 육군성 군무국 과원.
1930년육군 보병 대좌 진급. 육군성 군무국 징모과장.
1931년참모본부 작전과장.
1932년보병 제57연대 연대장.
1933년육군 습지노 학교 간사.
1935년육군 소장 진급. 보병 제40여단장.
1936년관동군 참모 부장 겸 주만주국 대사관 부속 무관.
1937년육군보병학교 간사.
1938년육군성 병무국장, 육군 중장 진급, 제5사단장 임명.
1940년교육총감부 본부장.
1941년제23군 및 제16군 사령관 임명.
1942년제8방면군 사령관 임명.
1943년육군 대장 임명.
1946년라바울 전범자 수용소 수감.
1947년오스트레일리아군 군사재판 판결(금고 10년). 자바섬 이송.
1948년공직추방 예비 지정.[25]
1949년네덜란드, 인도군 군사재판 판결(무죄).
1950년인도네시아에서 귀국, 마누스섬 복역 신청 및 복역.
1953년마누스섬 교도소 폐쇄로 스가모 구치소 이감.
1954년형기 만료로 스가모 구치소 출소.
1955년방위성 고문 취임.
1968년사망.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이마무라 히토시는 1886년 6월 28일 미야기현 센다이구에서 아버지 이마무라 토라오와 어머니 이마무라 키요미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8] 이마무라 가문은 센다이번 조시(上士) 가문이었다.[8] 그의 할아버지는 보신전쟁 당시 센다이번 참모를 지냈으나, 진주한 신정부군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취하여 번 내 강경파의 비난을 받았다. 이후 재산을 가신들에게 거의 나누어 주고, 신정부의 관직 제안에도 응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 아버지 토라오는 전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는 등 교육을 받았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사법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여 판사로 임관했다. 토라오의 아내 키요미는 육군 장교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권유로 이마무라 히토시와 그의 동생들은 육군 장교가 되었다.

신발다 중학교(고후 중학교에서 전학)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도쿄에서 시험 공부를 하던 중 판사였던 아버지를 여의면서 경제적으로 제일고등학교나 고등상업학교 진학이 어려워졌다. 어머니 키요미는 육군사관학교를 추천했고, 이마무라는 아오야마의 육군 훈련장에서 열린 천람열병식에서 메이지 천황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보기로 결심, 합격했다. 이때 시험에서 이마무라와 같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혼마 마사하루였고, 이후 두 사람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마무라는 어릴 적부터 야뇨증과 불면증으로 고생했다. 이 때문에 수업 도중 조는 일이 많아 교관에게 혼나는 일이 잦았는데, 동기생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러달라고 부탁하거나, 민가에서 고추 가루를 구해와 눈에 넣는 등의 노력을 통해 교관에게 더 이상 혼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907년 5월 31일, 육군사관학교 19기를 졸업하고, 견습장교가 되었다. 12월 26일에는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4연대에 배속되었다. 1915년 12월 11일에는 육군대학교 27기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황실 사령검을 받았다. 동기생으로는 혼마 마사하루(3번 성적)와 도조 히데키(11번 성적)가 있었다.

다음은 이마무라 히토시의 초기 생애 및 교육 관련 연표이다.

연도사건
1886년6월 28일, 미야기현센다이구에서 출생.
1905년7월, 사관후보생.
1907년5월 31일, 육군사관학교 졸업(19기), 견습사관.
1907년12월 26일,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 보병 제4연대 소속.
1910년11월,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
1915년12월 11일, 육군대학교 졸업(27기 수석).


2. 2. 군 경력

이마무라는 처음에는 문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일본 천황의 행차를 호위하는 육군의 위용에 감명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여 후보생으로 합격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야뇨증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여 수업 중 조는 일이 잦았지만, 동기생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러달라고 부탁하거나 고추 가루를 눈에 넣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8]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마무라는 육군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조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지만,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노력을 인정받아 무사히 졸업했다. 1915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은사의 군도를 받았다.[8]

1931년 8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에 임명되었다. 만주사변 발발 후, 독단적인 관동군조선군의 월경(越境) 행위에 대해 육군 최고 지휘부의 혼란, 국민적 지지, 세계 여론을 고려하여 반대했다. 관동군의 폭주가 청년 장교 조직인 벚꽃회(桜会)와 관련 있음을 인지하고 10월 사건 쿠데타 미수 사건 수습에 나섰다.[9]

만주사변 이후, 아사히 신문 편집국장 오가타 다케토라와의 면담에서 참모본부의 관동군 통제 부족을 인정하면서도, 현지 일본인들의 어려운 상황을 언급하며 이시하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행동을 옹호하고, 만주사변에 대한 여론의 지지를 호소했다. 이 면담을 계기로 아사히 신문은 만주사변에 대한 지지로 돌아섰다.[10]

관동군과의 협상을 위해 만주로 갔으나, 이타가키 세이시로 고급 참모와 이시하라 간지 참모에게 무시당하고 격분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중앙 통제에 반하는 관동군의 행동을 엄벌해야 한다고 회고하며, 이들이 훗날 승진한 것이 육군의 하극상 풍습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9]

1932년 4월, 보병 제57연대장에 임명되었고, 1936년 3월에는 관동군 참모 부장 겸 주만주국 대사관 부무관에 임명되었다. 관동군이 독단적으로 추진하던 내몽골 공작을 중앙에서 중단시키려 할 때, 이시하라 간지가 왔고, 이 자리에서 관동군 참모 무토 아키라는 이시하라를 조롱하며 "당신이 한 행동을 본받아 내몽골에서 실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마무라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9]

1933년 육군 시즈노 학교 간사 재임 중 독가스 훈련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교장 나카지마 게이고 소장의 중재로 무혐의 처분되었다.[11]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1월 육군성 병무국장을 맡았고, 11월에는 제5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39년 참모본부 제1부장 도미나가 교지 중장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한 "원조 루트" 차단으로 중국국민혁명군의 전투 능력을 상실시켜 중일전쟁을 종결시키려는 작전을 계획했다. 광서성 난닝시를 공략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이었는데, 사와다 시게루 참모차장 등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승인되었다. 제5사단은 1939년 11월 친저우시 해안에 상륙하여 난닝을 향해 진격, 11월 24일 시가지를 점령했다.

장제스는 대규모 반격 작전인 1939~1940년 동계공세를 명령했고, 12월 17일 제5사단이 방어하는 난닝 방면에도 반격이 시작되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중국군은 흥닝구(곤륜관)를 포위했고, 이마무라는 증원 부대를 파견했으나 고전했다. 12월 30일 곤륜관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곤륜관 전투) 제21군 사령관 안도 리키치 중장이 증원을 파견하여 1940년 1월 28일부터 총공격을 개시, 2월 4일에 중국군을 격퇴했다.[12] 결국 난닝 공략만으로는 "원조 루트"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계속해서 곤허선을 통해 중국에 물자를 보냈다.

1940년 3월, 교육총감부 본부장을 맡아 『전진훈』 기안을 담당했다. 그는 훗날 좋은 내용을 너무 많이 넣으려다 보니 너무 길어진 것이 실패였다고 회고했다. 『전시훈』은 원래 중일전쟁에서의 약탈, 강간, 민간인 살해 다발에 위기감을 느낀 이와쿠라 다케오의 발안으로, 이마무라는 "무고한 주민을 보호하고, 약탈 강간과 같은 불법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간결하게 써야 했다고 회고했다.[13]

2. 2. 1.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초기, 이마무라는 제16군 사령관으로서 자와섬 공략을 지휘하여 9일 만에 10만 명의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을 항복시켰다. 공략 당시 네덜란드 군에 의해 유배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 수카르노하타를 석방하고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현지인 관리 등용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군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적이 파괴한 석유 정제 시설을 복구하고 석유 가격을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절반으로 낮추었으며, 약탈을 금지하여 치안을 유지하는 등 현지인들의 호감을 얻었다.[33]

1941년 11월, 이마무라는 제16군 사령관이 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을 지휘하게 되었다. 자바로 향하던 중, 이마무라가 탑승한 수송선 신슈(류조)마루(Shinshu (Ryujo) Maru)가 아군 오폭으로 추정되는 어뢰 공격으로 침몰 (순다 해협 해전)하여, 이마무라는 해변까지 헤엄쳐 가야 했다.[2]

1942년 2월, 수마트라섬 남부 팔렘방의 중요 유전 지대 점령에 성공하였다. 3월에는 자바섬 상륙에 성공하였는데, 약 100척의 함대를 동원한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일본군의 병력을 오판한 적군의 실수와 더불어, 9일 만에 약 9만 3천 명의 네덜란드군과 약 5천 명의 영국군, 미국군, 오스트레일리아군을 무조건 항복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마무라가 제16군 사령관으로 탑승했던 육군특종선 신슈마루


자바섬 공략 당시 바타비아 해전이 발생하여 일본은 소해정과 수송선에 피해를 입었다. 이마무라가 탑승했던 수송선 용성환도 뇌격으로 침몰하여 구조될 때까지 약 3시간 동안 기름이 유출된 바다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헤엄쳐야 했다. 이는 어뢰의 성능, 사격선 등으로 미루어 지휘하던 제7전대의 오발 사격에 의한 피해임이 분명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적 어뢰정에 의한 피해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해군 측의 사과에 이마무라가 흔쾌히 승낙하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4] 이마무라는 상륙 후인 3월 1일 15시 50분 및 54분에 해군 제5수뢰전대·제7전대 사령관에게 "2월 28일 밤 귀 전대의 해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경축하며 겸하여 당군 주력의 전투에 대한 헌신적인 협력을 깊이 감사합니다.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육군 중장"이라는 감사를 보냈다.[15] 그러나 이 피해로 이마무라 부대는 제1차 상륙 부대의 양륙 후 사망자는 100명으로 억제되었지만, 원거리용 무선기와 암호표가 해저에 가라앉아 자바섬 중부·동부에 상륙한 별동대에 대한 직접 지휘가 5일 동안 불가능해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마무라는 전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 지역 주민들에게 이례적으로 관대한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는 남방군과 대본영의 상급 참모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계획과는 종종 상충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주민들(특히 그가 근거지를 두었던 자바에서)의 많은 지지를 얻었고, 일본군 점령의 어려움을 다소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네덜란드에 의해 유형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 수카르노하타 등 정치범을 석방하여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고 자문회 설립 및 현지인 관리 등용 등 독립을 지원하는 한편, 이마무라는 군정 지도자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공략한 석유 정제 시설을 복구하여 석유 가격을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절반으로 낮추거나,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몰수한 돈으로 각지에 학교를 건설하거나, 일본군 병사들에게 약탈 등 불법 행위를 엄금하여 치안 유지에 힘쓰는 등 현지 주민 위무에 힘썼다. 과거 지배자였던 네덜란드인에 대해서도 민간인은 주택가에 거주시키고 외출도 자유롭게 허용하고, 포로가 된 군인에 대해서도 고급 대우를 하는 등 관용적인 군정을 실시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에서는 의류가 부족해 배급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자바에서 생산되는 흰 목면의 대량 수입을 요청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마무라는 흰 목면을 가져가면 현지인의 일상생활을 압박하고, 사망자를 흰 목면으로 싸서 매장한다는 종교심까지 상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부와 군부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그 실정을 조사하러 온 정부 고관 어다마 히데오 등은 "원주민은 전혀 일본인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으며, 네덜란드인은 적대 행위를 포기하고 있다", "치안 상황, 산업의 복구, 군수 물자의 조달에 있어 자바의 성과가 뛰어나게 좋다" 등으로 보고하며 자바의 군정을 칭찬했다.

또한, 네덜란드 통치하에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독립가 '인도네시아 라야'가 자바섬에서 활발하게 불려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마무라는 도쿄에서 그 레코드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뻐했다.

그러나 정부와 군부 일부에는 이마무라의 통치를 비판하는 자도 있었고, 1942년 3월에는 이마무라와 친분이 있는 참모총장·스기야마 겐이 직접 바타비아에 출장하여 이마무라에게 "중앙은 자바 공략전에 대해 만족하고 칭찬하고 있지만, 한편 그 이후의 군정에 대해서는 비판이 너무 많으니 주의하라"고 가볍게 질책했다. 이때 스기야마로부터 "바탄 공략에 난항을 겪은 혼마 야스하루 군 사령관을 대본영이 경질할 예정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마무라는 스기야마에게 "바탄 공략의 난항은 대본영의 인식·지도 부족에 기인하는 바가 많고, 병력 부족 상태에서 바탄 점령을 서둘러야 했던 불운한 혼마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하다"라고 대본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혼마를 강력히 감싸 스기야마를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육군 중앙의 이마무라의 군정에 대한 비판은 강했고, 총리대신 겸 육군대신의 도조 히데키가 상황 조사를 위해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 소장과 인사국장 후미나가 쿄지 소장을 자바섬에 파견하여 이마무라와 면담을 하게 했다. 무토는 이마무라에게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강압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했지만, 이마무라는 일본군의 "점령지 통치 요강"에 명시된 "공정한 위덕으로 민중을 납득시키고 군수 자원 시설의 파괴 복구를 한다"는 규정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반론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무토와의 논쟁이 평행선을 그은 이마무라는 후미나가에게 "작년, 장관의 이름으로 전 육군에 공포된 '전진훈'은 아시다시피 제가 주재하여 기안한 것입니다. 그것에 반하는 것에 굴복하는 것은 제 양심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여기에 동석한 후미나가 인사국장은 장관에게 상신하여 개정된 '점령지 통치 요강'을 지령하기 전에 제 면직을 도모해 주십시오. 결론은 하나입니다. 신 요강의 발령을 볼 때까지 제 자바 군정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후미나가에게 자신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마무라는 "전진훈"에 명시된 "복종하는 자는 죽이지 않고, 따르는 자는 어루만져야 하며, 그 덕이 부족하다면 아직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황군의 본의를 감안하여 자애로운 마음으로 무고한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을 절대 준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를 시찰한 무토는 "이마무라 군의 군정 방침은 중앙의 의도와 반한다. 더 강압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의견을 바꾸지 않았지만, 후미나가는 이마무라의 강한 의지에 동의하여 경질하지 않았고, 1942년 10월에 "자바 군정에는 개변을 더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방침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라고 타전하여 이마무라의 방침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강압적인 군정을 하도록 요구했던 무토는 그 후 근위 사단장이 되어 수마트라섬에 부임했지만, 거기서 이마무라의 관용적인 군정에 의한 성과를 직접 목격하고 이마무라의 방침의 정당성을 인식하여 과거의 무례를 사과했다.[16]

1942년 말, 이마무라는 제8방면군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솔로몬 제도 전투의 제17군과 뉴기니 전투의 제18군을 담당했다. 이마무라는 그 후 뉴브리튼의 라바울에 근거지를 두었다.[3] 이마무라는 1943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마무라는 라바울에 부임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과 회견했다. 이마무라는 사관 시절 야마모토와 친분이 있었고 서로 간담상조하는 사이였는데,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죽은 후 아주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마무라 자신도 비행기로 시찰 도중 미군기의 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위험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다.

태평양의 섬들이 미군에게 함락되자 이마무라는 보급이 되지 않아 굶어 죽은 과달카날 주둔 병사들의 비극을 전해 듣고, 섬에 대량으로 전답을 만들어 손수 밭을 갈고 작물을 수확해 병사들을 먹여 살렸다.

미군은 라바울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라바울의 해군, 공군을 무력화시키면 해상 주도권이 미국에게 있는 한 라바울의 일본군은 나오지 못하고 미군은 마음 놓고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라바울이 본토를 공략하는 데 전략적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필리핀처럼 자원이 풍부하거나 정치적 중요도가 높은 것도 아니어서 미군은 큰 피해를 무릅쓰고 점령할 가치가 없는 섬이었다.

이마무라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지하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이마무라가 경작한 전답으로 보급이 없어도 물자가 충분했기에 전쟁이 중단될 때까지 라바울은 일본군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이마무라의 후임인 하라다 쿠마키치 중장은 이마무라와는 반대로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자바에서는 반일 게릴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군정 초기의 여러 주민 회유 및 독립 운동에 대한 이해 등은 수카르노와 독립 운동에 관계된 인도네시아 병사 등으로부터 평가받고 있으며, 이마무라 이임 후 일본군의 여러 악평과 대조적이라는 의견도 있다.[9]

이마무라에 의한 자바 군정에 대해 "현재도 인도네시아의 역사 교과서에 게재되어 평가받고 있다"는 주장이 일본에서 이루어졌지만, 일본 군정에 대해 엄격한 평가를 하는 인도네시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그러한 기술은 없다.[17][18]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마무라는 지휘관으로서 호주 전범재판에 소환되었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호주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처형시킨 것을 용인하고 2만여 명의 인도인들을 강제로 인도 국민군에 배속시켰다는 혐의로 B급, C급 전범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34] 그는 재판에서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죄를 저지른 자신의 부하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판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이마무라 휘하 라바울 주둔군 가운데 390명이 포로 학대와 학살로 전범 재판을 받고, 266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7명이 사형당했다.[35] 이는 이마무라가 휘하 장병들의 전쟁범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다. 지휘관의 제대로 된 조치가 있었다면 상당수의 포로 학대와 전쟁 범죄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재판에서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는 이 모든 전범 행위를 몰랐다며 선처를 요청했고, 실제로 이 많은 포로 학대 건을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재판부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많은 전범 케이스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으며, 대부분의 책임은 고스란히 라바울의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에게 돌아갔다. 아다치 중장의 변호사가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다치 중장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이마무라는 학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부하 장교들에게 탄원서를 써준 적이 있다.

그 후, 제16군 당시 책임 문제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무죄를 선고받았다.[36] 1949년, 이마무라는 스가모 구치소로 이송될 예정이었지만, 현지에 계류 중인 부하들을 두고 자신만 도쿄에 돌아갈 수 없다며 일본군 병사들이 수용된 마누스 섬 수용소에 입소하는 것을 희망하였고, 처를 통해 맥아더에게 알렸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형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한 후, 자택에서 두문불출하고 근신하며 전쟁의 책임을 반성하는 등 소박한 생활을 했다. 이후 회고록을 출간, 그 수입료를 모두 전사자 유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본국립도서관 헌정자료과실에는 그의 육성이 담긴 정치 담화 녹음이 남아 있으며, 이마무라는 1968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전쟁 범죄 재판에서는 불법 행위에 대한 감독 책임으로 B·C급 전범 혐의가 걸렸다. 라바울에서 열린 호주 군사 재판에서 징역 10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자카르타에서 열린 네덜란드 군사 재판에서는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이마무라 히토시의 말에 따르면, 호주군의 유죄 판결에 따라 미·호·란의 합의로 스가모 구치소 수감이 명령되었지만, 부하들과 함께 마누스섬에서 복역하는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고 한다. 1950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마누스섬 호주군 형무소에서 복역했지만, 형무소 폐지에 따라 다른 일본인 수감자들과 함께 스가모로 이감되어 1954년 1월에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수감 중 집필을 시작하여 출소 4년 후에 『이마무라 킨 회고록』(今村均回顧録)을 완성했다.

1955년 9월 24일, 방위청 고문에 취임했다.[21] 이듬해 1956년, 전일본 궁도연맹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68년 10월 4일, 사망. 향년 82세.

4. 평가 및 논란

이마무라 히토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 장성으로, 그의 군사적 행적과 통치 방식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이마무라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바타비아 해전에서 일본군 수송선 "용성환"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고, 이마무라 본인도 바다에서 구조될 때까지 3시간 동안 헤엄쳐야 했다. 이 사건은 해군 측의 오발 사격에 의한 피해였지만, 이마무라는 해군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14]

전쟁이 끝난 후, 이마무라는 연합군 포로 학살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호주 육군에 의해 라바울에 구금되었다.[4] 특히 "돼지 바구니 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포로들이 돼지를 운반하는 데 사용되는 대나무 바구니에 실려 이동된 악명 높은 사례이다.[4] 이마무라는 1946년 4월, 자신의 전쟁 범죄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여 부하들의 기소를 앞당길 것을 요청했다.[5] 그는 "부대원들이 잔혹 행위 및 기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다.[6] 1947년 5월, 호주 군사 법원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7] 1954년 석방될 때까지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자신의 수감 생활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여 정원에 감옥 모형을 만들고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7]

4. 1. 긍정적 평가

네덜란드에 의해 유형되었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 수카르노하타 등 정치범을 석방하여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고 자문회 설립 및 현지인 관리 등용 등 독립을 지원하는 한편, 이마무라는 군정 지도자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공략한 석유 정제 시설을 복구하여 석유 가격을 네덜란드 통치 시대의 절반으로 낮추었다. 또한 네덜란드군으로부터 몰수한 돈으로 각지에 학교를 건설하거나, 일본군 병사들에게 약탈 등 불법 행위를 엄금하여 치안 유지에 힘쓰는 등 현지 주민 위무에 힘썼다.[9] 과거 지배자였던 네덜란드인에 대해서도 민간인은 주택가에 거주시키고 외출도 자유롭게 허용하고, 포로가 된 군인에 대해서도 고급 대우를 하는 등 관용적인 군정을 실시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본에서는 의류가 부족해 배급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자바에서 생산되는 흰 목면의 대량 수입을 요청했지만, 이마무라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이마무라는 흰 목면을 가져가면 현지인의 일상생활을 압박하고, 사망자를 흰 목면으로 싸서 매장한다는 종교심까지 상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와 군부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그 실정을 조사하러 온 정부 고관 어다마 히데오 등은 "원주민은 전혀 일본인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으며, 네덜란드인은 적대 행위를 포기하고 있다", "치안 상황, 산업의 복구, 군수 물자의 조달에 있어 자바의 성과가 뛰어나게 좋다" 등으로 보고하며 자바의 군정을 칭찬했다.

또한, 네덜란드 통치하에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독립가 '인도네시아 라야'가 자바섬에서 활발하게 불려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이마무라는 도쿄에서 그 레코드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뻐했다.

1942년 3월, 이마무라와 친분이 있던 참모총장·스기야마 겐이 직접 바타비아에 출장하여 이마무라에게 "중앙은 자바 공략전에 대해 만족하고 칭찬하고 있지만, 한편 그 이후의 군정에 대해서는 비판이 너무 많으니 주의하라"고 가볍게 질책했다. 이때 스기야마로부터 "바탄 공략에 난항을 겪은 혼마 야스하루 군 사령관을 대본영이 경질할 예정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마무라는 스기야마에게 "바탄 공략의 난항은 대본영의 인식·지도 부족에 기인하는 바가 많고, 병력 부족 상태에서 바탄 점령을 서둘러야 했던 불운한 혼마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너무하다"라고 대본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혼마를 강력히 감쌌다.

총리대신 겸 육군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상황 조사를 위해 군무국장 무토 아키라 소장과 인사국장 후미나가 쿄지 소장을 자바섬에 파견하여 이마무라와 면담을 하게 했다. 무토는 이마무라에게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강압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했지만, 이마무라는 일본군의 "점령지 통치 요강"에 명시된 "공정한 위덕으로 민중을 납득시키고 군수 자원 시설의 파괴 복구를 한다"는 규정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반론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무토와의 논쟁이 평행선을 긋자 이마무라는 후미나가에게 "'전진훈'은 내가 주재하여 기안한 것이다. 그것에 반하는 것에 굴복하는 것은 내 양심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장관에게 상신하여 개정된 '점령지 통치 요강'을 지령하기 전에 내 면직을 도모해 달라. 신 요강의 발령을 볼 때까지 내 자바 군정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겠다"라고 자신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마무라는 "전진훈"에 명시된 "복종하는 자는 죽이지 않고, 따르는 자는 어루만져야 하며, 그 덕이 부족하다면 아직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황군의 본의를 감안하여 자애로운 마음으로 무고한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을 절대 준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를 시찰한 무토는 "이마무라군의 군정 방침은 중앙의 의도와 반한다. 더 강압적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의견을 바꾸지 않았지만, 후미나가는 이마무라의 강한 의지에 동의하여 경질하지 않았고, 1942년 10월에 "자바 군정에는 변경을 더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방침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라고 타전하여 이마무라의 방침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강압적인 군정을 하도록 요구했던 무토는 그 후 근위 사단장이 되어 수마트라섬에 부임했지만, 거기서 이마무라의 관용적인 군정에 의한 성과를 직접 목격하고 이마무라의 방침이 정당함을 인정하여 과거의 무례를 사과했다.[16]

이마무라의 후임인 하라다 쿠마키치 중장은 이마무라와는 반대로 강압적인 통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자바에서는 반일 게릴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군정 초기의 여러 주민 회유 및 독립 운동에 대한 이해 등은 수카르노와 독립 운동에 관계된 인도네시아 병사 등으로부터 평가받고 있으며, 이마무라 이임 후 일본군의 여러 악평과 대조적이라는 의견도 있다.[9]

1942년 3월 10일(육군기념일)자 《요미우리 신문》 기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무조건 항복을 보도하면서, 사진과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 방면 육군 최고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이마무라 장군은 센다이 출신의 사족으로 육군대학교를 수석 졸업한 수재이지만, 그 재능과 불굴의 투지를 온화함으로 감싸는 현대적인 무장이다", "교양이 풍부하고 부하를 사랑하는 겸손하고 품격 있는 장군이다", "인정 장군 이마무라 중장"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라바울에서 복무하던 중 시찰차 온 이마무라에게 말을 건네받은 적이 있다. 미즈키는 당시 인상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따뜻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22]

이마무라는 독서가였고, 문학 소년이었던 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성경과 《탄이쇼》(歎異抄)를 애독했다. 부하들에게도 자주 읽을 것을 권했다.[23] 이마무라는 "팔굉일우(八紘一宇)가 동일 가족 동포주의인데, 왜 침략주의처럼 생각되는가?"라고 말했고, 그 단어에 대한 오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자신의 저서에서 노기 히데노리를 군사적으로 무능하다고 평가한 것에 대해 이마무라는 《요미우리 신문》에 "노기 장군은 무능하지 않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4. 2. 부정적 평가

이마무라 히토시는 연합군 포로 학살을 포함한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호주 육군에 의해 라바울에 구금되었다.[4] "돼지 바구니 학살"은 자바 동부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돼지를 넣는 대나무 바구니에 실려 이동된 악명 높은 사건이다.[4] 1946년 4월, 이마무라는 자신의 전쟁 범죄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여 부하들의 기소를 앞당길 것을 요청했다.[5] 그는 "부대원들이 잔혹 행위 및 기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되었다.[6] 1947년 5월, 호주 군사 법원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7] 1954년 석방될 때까지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했으며, 자신의 수감 생활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여 정원에 감옥 모형을 만들고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7]

전쟁 범죄 재판에서 불법 행위에 대한 감독 책임으로 B·C급 전범 혐의를 받았다. 라바울에서 열린 호주 군사 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자카르타에서 열린 네덜란드 군사 재판에서는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이마무라의 요청에 대해 맥아더는 "일본에 와서 처음으로 진정한 무사도에 접한 기분이었다. 나는 즉시 허가하도록 명령했다"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1950년 3월부터 1953년 8월까지 마누스섬 호주군 형무소에서 복역했지만, 형무소 폐쇄로 다른 일본인 수감자들과 함께 스가모로 이감되어 1954년 1월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참조

[1]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2] 웹사이트 WW2 Database
[3] 웹사이트 Pacific War Online Encyclopedia
[4] 웹사이트 Pig Basket Atrocity http://members.iinet[...]
[5] 웹사이트 Australian War Memorial – AJRP http://ajrp.awm.gov.[...]
[6] 웹사이트 Trial of Tomoyuki Yamashita. Law Reports, UNWCC, 1948. Part VI http://www.ess.uwe.a[...]
[7] 서적 2020
[8] 서적 第2章:緒戦の連勝と米軍の反攻:今村均 徳政を布いた仁将 2013
[9] 서적 今村均回顧録 芙蓉書房出版 1993-10-25
[10] 방송 日本人はなぜ戦争へと向かったのか 第3回 “熱狂”はこうして作られた NHK 2011
[11] 서적 個性派将軍 中島今朝吾 光人社 1987
[12] 웹사이트 「第七五回帝国議会 貴族院解説」南寧作戦と中国軍の冬季大攻勢 https://furuyatetuo.[...] 古屋哲夫 2021-09-25
[13] 서적 続今村均回顧録 芙蓉書房出版 1993-10-25
[14] 서적 蘭印・ベンガル湾方面海軍進攻作戦 戦史叢書
[15] 기록 昭和十七年一月一日~昭和十七年三月十九日 第五水雷戦隊戦時日誌 第5水雷戦隊司令部
[16] 서적 1984
[17] 서적 インドネシア その人々の歴史 帝国書院 1983-04-01
[18] 서적 アジアの教科書に書かれた日本の戦争 東南アジア編 梨の木舎 1990-04-25
[19] 서적 ニミッツの太平洋海戦史 恒文社
[20] 잡지 巻頭随筆 文藝春秋 2014-12
[21] 신문 朝日新聞 1955-09-24
[22] 서적 カランコロン漂泊記 小学館文庫
[23] 잡지 歴史街道 2000-09
[24] 서적 ヤクルトスワローズ球団史
[25] 문서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総理庁官房監査課 1949
[26] 공보 叙任及辞令 官報 1938-05-07
[27] 공보 叙任及辞令 官報 1940-01-18
[28] 공보 辞令二 官報 1941-10-23
[29] 웹사이트 社団法人日本人間学界代表理事 http://www.ningengak[...] 2016-11-01
[30] 서적 未知の剣 陸軍テストパイロットの戦場 文春文庫 2002
[31] 서적 陸軍大将略歴〔昭和期( 昭和十六年から二十年までに親任)〕:今村均 2013
[32] 웹사이트 マジョール(少佐)! 貴方のソンネボーイに乗せて下さる? http://www.equitatio[...] 日本馬術連盟 2023-06-20
[33] 서적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34] 웹사이트 http://www.austlii.e[...]
[35] 웹사이트 https://www.ocf.berk[...]
[36] 서적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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